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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대충’과 ‘똘레랑스(Tolarance)’
2004.03.02, 이부승
 
제목 ‘대충대충’과 ‘똘레랑스(Tolarance)’

[발췌 글]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하는 자세 가운데 가장 많이 지적받는 부분이 매사를 철저하게 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해치운다는 점이다. 그럴 때마다 비교되는 것이 일본이나 독일처럼 매사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나라들의 완벽성에 대해서 들으면 부러움에 앞서 왠지 답답하게 느껴지고 나아가 삶의 여유마저 없어 보인다. 또 우리가 그들처럼 되기 어렵겠다는 생각과 함께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다른 것을 인정하는 여유
그렇다면 일에 있어 ‘대충대충’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삶의 여유를 잃지 않는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얼마 전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란 책을 읽다가 알게 된 프랑스인 특유의 ‘똘레랑스(Tolerance)’가 그 대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똘레랑스’는 언뜻 보면 우리의 ‘대충대충’과 비슷한 것 같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의 ‘똘레랑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더 간단하게 표현하면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는 여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흑백 논리가 판을 치고 대호와 다양성이 자리 잡지 못한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둘째는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를 뜻한다.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법에 매이지 않는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통한다.

탁월함과 완벽주의
이처럼 ‘대충대충’과 확실히 구별되는 ‘똘레랑스’는 직장 생활에 아주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더 이상 ‘대충대충’ 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나 서비스 분야의 탁월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충대충’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완벽주의로 가서도 안 된다. 탁월함은 완벽 추구와는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탁월한 윤리 수준을 요구하셨다. 반면 간음하다고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를 돌로 치려는 완벽 추구의 사람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도전의 말씀을 하셨다. 물론 예수님 역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탁월함이다. 예수님은 결코 완벽주의에 빠지지 않으셨다. 이 둘을 구분 짓는 것이 바로 삶의 여유이며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타협과 관용
이것은 타협과 관용의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잘못된 관행, 또는 대충 넘어가려는 사람들과 그냥 타협해서는 안 된다. 끊을 것은 끊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비타협적인 사람들은 자칫 자신과 다른 사람, 특히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용납하기 어렵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신앙인의 ‘똘레랑스'다.
유대 왕 히스기야에게서 균형 잡힌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히스기야 왕은 왕위에 오른 후 종교 개혁을 단행하면서 아세라 목상을 비롯한 모든 우상들을 다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향하여 분향하는 것을 보고 그것마저 부숴 버렸다(왕하18:4). 아마도 당시 백성들의 오랜 전통 때문에 소신대로 밀고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 개혁을 ‘대충대충’ 하지 않았다. 철저한 개혁을 위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따.
그러나 이런 비타협적인 히스기야 왕에게서 의외의 관용을 찾아볼 수 있다. 히스기야 왕은 우상을 타파한 이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불러서 함께 유월절을 지내도록 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온 북쪽 사람들이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않고 유월절을 양을 먹음으로써 기록한 규례를 어겼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그들을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들을 고쳐 주셨다(대하30:18-19). 그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관용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직장인들은 ‘대충대충’의 덫에서 헤어나야 한다. 탁월함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적당한 선의 타협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완벽주의에 빠져서 서로를 괴롭히지 말고 그리스도안에서 관용을 보여 주어야 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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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deabo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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