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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빨간색 플래너 이야기

어린 시절의 저는 기억력 하나는 자신 있는 편이었습니다. 대학시절에도 다이어리에 간단한 메모 하나만으로도 관련된 에피소드를 꽤 상세히 기억할 수 있는 편이라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해 본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약속을 미리 적어두고 일정을 확인하기 보다는 '몇 시 어디 누구' 정도만 약속이 끝난 뒤에 간단히 적어두면, 나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죠. 물론 생활 패턴이 단순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믿으며 지냈습니다. 메모 때문에 곤란한 상황 같은 건 상상해보지도 못하고, 내게 일정관리도구가 필요한 날들이 올 것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못하며 거의 대부분을 기억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다. - 데이터 실종 사건

그러다가 프랭클린 플래너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회사에 입사한 2003년, 그것도 정신 없는 인턴이 지나고 약간 여유가 있어진 여름쯤이었습니다. 그 전부터 플래너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관심 있게 알아본 건 그쯤입니다. 사람들이 연초가 되면 새로운 기분으로 새 다이어리를 준비하거나,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는 것처럼 저도 회사에 입사해서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새롭게 시작하면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는 일이 PC를 주로 사용하는 일인지라 당시에는 PC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일정관리를 하고, 메모 내용은 다시 옮겨서 정리 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플래너를 사용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일반 다이어리와 프랭클린 플래너와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한 저의 착각이었겠지요.

그러다 2006년 중순에 큰마음을 먹고 플래너를 구입하게 된 계기가 생겼습니다. PC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관리 해왔던 업무내용, 메모 등을 한 번에 날리게 된 것입니다. 다른 곳에 백업 받아 두긴 했지만 가장 최근의 자료는 백업 전이었고, 복구가 불가능하게 되어 실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입사 초와 달리 출장이 많아지면서 정리가 안된 메모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정을 관리하기 보다는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데 급급해져 머리는 복잡하고 일은 일대로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돌파구로 선택한 것이 프랭클린 플래너의 구입이었습니다. 플래너 중에서 제일 큰 클래식 사이즈 베이직 바인더를 구입했습니다. 연말까지 반년치의 속지를 파는 상품이 있어서 '오호 이걸 사고 내년에 새로운 속지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게 되었습니다. 글씨를 작게 쓰면 뭐라고 쓴 건지 본인도 잘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제일 큰 사이즈가 맞겠다 싶었고, 세세한 내용에서 단순 메모까지 한 번에 다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지요. 처음 두 달 정도는 잘 기록했습니다. 플래너를 처음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모두 고민할 것이라 생각하는 가치와 사명 정하기, 앞으로는 가로선 위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다짐. 등을 생각하고 사용하면서 하루하루가 지났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야 지속적으로 쓸 수 있다!

그런데 급한 일들이 해결되고 나니 쓰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하더군요. 핑계일지 모르지만 제가 선택한 사이즈도 문제였습니다. 속지 크기만 생각하고 바인더의 크기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실제 플래너의 크기는 예상했던 크기보다 컸고, 그 무게가 주는 압박이 상당했습니다. 회사에 놓고 다니면 막상 중요한 기록을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들고 다니자니 벽돌 하나 지고 다니는 셈이라 그렇게 저의 첫 플래너 사용은 그렇게 서 너 달이 지나고 막을 내렸습니다. 플래너를 사용하다가 사용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런 이유 때문에 불편을 느끼지 않을까 합니다. 휴대성과 성능, 가격 중에서 갈등하다가 약간 무거운 걸 사게 되면 노트북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집에서만 쓰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죠.

그렇게 어영부영 사이즈 탓만 하다가 2007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이 되면 새로운 속지와 함께 시작하자.' 는 생각을 하며 2007년을 시작했지만, 정작 내게 맞는 사이즈를 선택하여 새로운 제품을 구입하기까지는2007년을 절반이나 넘겨 버린 것이죠. 다시 잦은 출장으로 인해 회사 업무의 맥이 끊어지다보니 과거에 플래너의 도움을 받았던 저로서는 다시금 플래너를 통해 생활의 틀을 다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핑계로 삼지 못하게 작은 사이즈로 구입해야지 생각하고 플래너를 사용하는 지인의 충고를 받아 CEO 사이즈를 구매했습니다. 분기별로 속지를 판매하는 플래너라서 10월부터 사용하는 데 무리도 없었습니다. 빨간색 엘브릿지 바인더라 아저씨와는 안 어울린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마음에 들어야 자주 꺼내보고 자주 사용할 거란 생각에 과감히 구입했습니다.

초보가 제안하는 플래너 작성 TIP

저의 플래너 사용은 처음 두 달을 제외하면, 사실 가장 간단한 것도 생략하여 쓰고 있는 플래너 사용 초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노하우는 있는 법. 저만의 사용 TIP을 소개하자면 저의 플래너 사용 포인트는 속지를 월초에 끼워 넣을 때 전 달의 마지막 일주일 분량을 남겨두고 끼워 넣는 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월별로 앞에 정리하지만, 세세한 내용이 필요할 경우가 있어서 업무의 연계성을 위해 이렇게 관리합니다. 다시 사용하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TIP 이 저한테는 도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업체와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기록해 두고, 일주일 정도 뒤에 일정을 확인 하는 과정에서 전 회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진행 되려고 하는 것을 정정해서 일정을 진행 할 수 있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월말에서 월초로 넘어가는 때여서 제 사용법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플래너를 꼭 들여다보는 시간을 할애하는 것입니다. 업무 내용 때문에 플래너를 참고하기 위해 들춰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정리하거나 시작하는 시간을 갖으면서 플래너와 친해지는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이니 플래너를 처음 사용하면서 '아~ 잘 써야지', '비싼 거 사 놓고 이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보다는 천천히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별다른 방법은 아니지만 저만의 TIP을 가지고 있는 건 플래너를 잘 써보자 하고 생각하면서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플래너의 고가정책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고민을 거듭하면서 고가의 바인더와 플래너를 구입했으니 더 아끼고 관심을 두고 가까이 하게 될 테니 플래너가 주는 장점과 가치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의 시간이 좀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습니다.

플래너에게 바란다!

플래너에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 달력에 보면 오타(?) 라고 해야 할 지 30일 31일이 월초에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조그만 부분에도 신경 써주는 모습 보여주셨으면 좋겠고, 일일 지출 항목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항목을 세세히 적어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어떤 날은 지출 항목을 넘어가게 되면 정리하기 지저분해지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웹상으로 플래너의 실물 크기를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에 들고 자주 쓰는 물건이라서 실제로 확인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실제로 확인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용자를 위해서 고려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일상의 행복감을 주다!

플래너는 결심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회사에 출근해서 하루의 일정을 확인하고, 집에 와서 하루를 정리하다 보니, 매번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실천을 한 번 더 강요하게 됩니다. 저는 다이어트 부분에서도 약간의 체중감량의 효과도 보고 매번 시간이 없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넘어가던 공부도 조금씩 시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역할로 정한 내용 중에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남편’, ‘함께 하는 아빠’ 가 있기 때문에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고 작은 감동을 주기도 하고, 이제 10개월 된 딸아이와는 이전과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좀 더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제 좋은 습관으로 몸에 배여서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아있는 셈이죠.

사실 저는 얼마 전에 플래너 사이트에서 본 '바인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답 글이 전적으로 맞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일반 다이어리를 사용해도 사람에 따라서 플래너가 주는 외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인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기록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사명을 생각하고 그에 따른 목표를 정해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플래너가 주는 것과 같은 도움을 주진 못 할 거라 생각합니다. 결국, 플래너를 잘 쓴다는 건 '플래너의 도움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을 실행하는 능력을 갖는다.' 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플래너 사용을 위한 교육을 듣거나 사용자들이 교과서처럼 생각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10가지 자연법칙’을 읽지 못하고 플래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가까운 시간 안에 교육도 신청하고 책도 읽으면서 좀 더 나은 플래너 사용을 통해 ‘플래너를 잘 쓰는 사람' 이 될 수 있게 노력할 생각입니다.

 
 

김상운 ㈜현대제이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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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deabo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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